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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16, 2015

'박근혜 7시간' 의심, 박래군은 의인이 아니다 [함께살자, 박래군과!④] 보통사람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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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 5월 세월호 참사 추모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포승줄에 묶인 채 22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 호송 차량에 오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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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의 석방을 촉구하는 글을 부탁 받은 지 달포가 되어가도록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당연히 써야 했고, 쓰겠노라 답했지만, 자리에 앉아 연필을 잡으면 글이 나가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더웠고, 한밤중에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끈적한 땀기운을 느낄 때면, 피할 데도 없는 옥방에서 땀을 닦고 있을 박래군 생각이 났다. 마음이 헝클어지듯 종잡을 수 없는 언어는 좀처럼 글로 엮어지지 않았고, 포기하기를 거듭하다 결국 지금까지 오고 말았다.

10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글품이나 팔고 푼돈이나 후원하면서 박래군과 그의 동료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는 '시민'이었지만, 그 몇 년 사이 어쩌다보니 나도 박래군과 같은 '활동가'가 되었다. 지난 4년간 밀양송전탑 싸움을 하면서 나도 몇 번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이 있었고, 신경줄이 조여드는 기분을 견디며 쏟아지는 일들을 처리할 때, 수시로 엄습하는 서러움과 외로움의 맛을 알게 되었다.

고작 4년 남짓 활동가로 일하면서 나는 폭삭 늙어 버린 것 같은데, 박래군은 무려 30년간을 이러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고도 또 감옥엘 가야 하다니. 우리는 박래군이 왜 감옥에 갔는지 잘 알고 있다. 대통령 선거 TV토론에서 이정희 후보가 내뱉은 '다카키 마사오' 그 한 마디가 누군가의 눈에 레이저 광선을 번득이게 했고, 결국 통합진보당이 해산되고 말았던 것과 아마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는 사냥꾼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듯 스스로를 내던졌다.

4·16연대 사무실이 털리고 난 뒤, 박래군은 '날 잡아가라'는 듯 세월호 사고 당일 대통령의 '7시간 부재'에 대한 우리 나름의 '합리적 의심'을 기자회견 자리에서 내뱉었다.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도 눈곱만큼의 '개전의 정'도 느낄 수 없도록 거침없었다. 나는 박래군이 세월호 싸움의 불쏘시개로 스스로를 던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활동가라면 박래군처럼

4년 전, 다른 인생을 살고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낸 며칠 뒤에 밀양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분신 사망 사고가 났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박래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아닌 누구라도, 박래군을 알든 모르든,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박래군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같이 살던 동생의 분신 자결로부터 1991년 헤아리기도 숨찬 수많은 열사들의 장례식과 수습을 맡아 하던 '재야의 장의사', 그리고 용산참사 범대위 집행위원장으로 수배와 옥살이를 했던 박래군 말고 누구에게 그 황망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 있었겠나. 그 후로 박래군은 간간이 나에게 밀양 상황을 물으며, '도와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한번 해 보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미안해했다'. 가장 미안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또 가장 미안해하는 이 역설이란.

박래군이 일했던 단체에 내 친구들도 여럿 일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박래군을 그 사무실에서 마주친 적이 없다. 박래군을 만났던 곳은 늘 거리의 농성장, 단식장, 행진 대열 속이었다. 아들 뻘 되는 젊은 활동가들이 그를 아무런 경칭 없이 '래군!'이라고 부르고, 반말에 가까운 말투로 대화하는 것이 또한 너무 자연스러웠다.

몇 년간 그렇게 박래군과 그의 동료들을 만나면서 나는 '활동가란 이렇게 살아간다'는 기준과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고, 내게도 그런 가능성이 펼쳐졌을 때 나는 별 주저없이 활동가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느 필자는 박래군의 석방을 촉구하는 글을 쓰면서 자신이 겪은 진보활동가들에 대해 거의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쏟아냈지만, 최소한 내가 아는 박래군의 동료들은 그런 비난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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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군을 석방하라"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박래군 석방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집회를 주최한 혐의로 구속된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의 석방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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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을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한진 희망버스 2심 선고가 있던 부산고등법원에서였다. 그저 희망버스 참가비를 모집하는 통장을 만들 때 이름을 빌려준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박래군은 '주모자'로 찍혀서 기소 당했다. 지난 십수년간 박래군은 모금을 위한 통장을 개설할 때 이름을 빌려올 만한 신뢰와 명망을 갖춘 운동권의 몇 안 되는 선배였다.

그때 그는 내가 기소된 '죄목'들을 확인하다 '기부금품법 위반'을 듣고는 깜짝 놀라더니 나를 잠시간 얼싸안고 토닥여주었다. '아이고, 그거 사람 미치게 하는 건데'라며. 밀양송전탑 기부금품법 사건으로 몇 달간 겪었던 마음고생이 한순간에 쪼그라드는 느낌이랄까.

기부금품법은 1천만원 이상 기부금품 모금처 등록 신청을 해도 당국이 '거부'하면 자연스럽게 모금행위는 불법이 되고 만다. 그리고 공권력은 계좌 압수 수색을 통해 '먼지를 턴다'. 홀애비 사정을 과부가 안다고 했던가.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계좌를 압수수색 당해 본 사람, 사생활까지 남김없이 털리는 수치와 모욕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맘 고생을 그가 공유해 주었다.

박래군은 늘 흥부네 사촌처럼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또 한편 만만치 않게 고집스럽고, 오만한 데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를테면, 작년 세종대 강당에서 열린 '2014 인권콘서트'에서 "종북콘서트 때려치우라"며 선글라스를 낀 이상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난입했을 때의 일이다.

고성과 몸싸움이 오가는 아수라장에서 토크쇼 사회를 보던 천주교인권위 김덕진은 "여러분! 괜찮죠~ 괜찮습니다"며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진땀을 뺐고, 다산인권센터 박진은 분을 참지 못하고 따박따박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앙에 앉아있던 박래군은 꼰다리를 풀지 않고 거만하게 앉아 십여 분을 버티고 있었다. 형편없는 존재들 앞에서 뿜어내는 그의 오만한 기운이 참 멋졌다.

그렇지만 박래군은 평소에는 허둥지둥 사는 것 같았다. 그가 일하는 인권재단 사람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정작 사회자인 박래군이 시간을 맞추지 못해 토론회는 10여 분 늦게 시작했고, 허겁지겁 달려온 그는 메고 온 가방을 풀어놓자마자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았다. 그리고 발표 도중 잠시 옆을 보았더니 그는 졸고 있었다.

세월호 광화문 농성장에서 단식 중이던 지난 4월 어느 날 그를 만났을 때, 담배를 피우는 게 걱정이 되어 괜찮냐고 했더니 '아직은 괜찮다'며 실실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괜히 내 마음이 쓰라려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박래군이 지금 주어진 강제 구금의 시간을 '휴식과 재충전'으로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속편한 생각도 해 본다. 무더위만 아니라면.

'또 다른 박래군'이 나와야 한다

세상 많은 이들은 그를 이 시대의 의인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가 보기 안쓰럽고 짠한 고난의 화신으로 '타자화'되면서 조금씩 우리로부터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활동가인 내가 생각하기에 박래군의 삶은 존경의 대상이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그가 짊어진 짐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다.

박래군이 다시 감옥에 가는 참혹한 일이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많은 '또 다른 박래군'이 나와야 하는 것이고, 그들이 모두 '나도 잡아가라'며 버티면서 박래군을 지켜주는 것이다. 박래군처럼 훌륭하지는 않고, 더러 흠결과 과오를 안고 있을지라도, 지치지 않고 일하고 버텨나갈 수 있을 물질적 기반도 마련되어야 한다.

구속 직전까지 세월호 국민대책위 활동과 함께 박래군이 매진했던 일도 바로 인권활동가들의 처우를 조금이라도 개선하자는 이른바 '365기금' 사업이었다. 소박한 양심과 평균 수준의 정의감을 갖춘 사람이 '나도 박래군처럼 되고 싶다'고 곳곳에서 불쑥불쑥 일어설 수 있는 길이 어디 있겠나.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초저임금에,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업무를 감당하며, 운동판 곳곳에 포진한 수많은 도덕군자들의 비난과 욕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이 나라에서 활동가로 살아가는 이들이 져야 할 십자가일진대, 어느 누가 '나도 박래군처럼 살고 싶다'고 나서겠는가.

운동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곳곳에 넘쳐나는데, 정작 운동을 '하는' 사람은 왜 이렇게 드물까. 그래서 늘 극소수의 활동가들이 이 어마어마한 일들을 다 떠맡아 동분서주하고, '이번에도' 박래군이 감옥을 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보통사람이다. 박래군도 그럴 것이다. 이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지금 떠메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위가 한풀 꺾여서 옥중의 박래군 건강 걱정이 한결 덜어졌다. 박래군의 조속한 석방을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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